by 한아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은 과거사에 대한 '오래된' 회고담이다. 17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현우(지진희)가 석방된 후, 도피생활을 하던 윤희(염정아)의 집을 찾아가면서 뜨겁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과거를 다시 기억하고 복구해낸다.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정조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남자가 과거의 상처와 절망과 좌절을 현재에 대면하면서 그 아픔을 동시대로 전이하는 것이다. 아픈 시대를 살았던 남자와 그의 연인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채로 남는다.
임상수의 영화 <오래된 정원>은 이 회고담에 드라마의 충실성으로 화답하고 있지만 과거의 아픈 기억에 매여 있기보다 과거의 부채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데 보다 세심한 공을 들인다. 현재 서울이란 공간의 시각화와 원작에 없었던 현우의 가족을 다루는 플롯(그의 어머니가 강남 땅 투기로 큰 부자가 된 ‘서초동 빨간 바지’였다는 설명)이 추가되면서 현우의 17년의 공백과 단절의 진폭이 확대된다. 영화에서 현우의 과거로의 여행은 현재의 존재론적 동인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영화가 부채의식으로부터 다소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주요한 이유는 윤희의 집(오래된 정원)의 낭만적 기술을 최소화하고, 정원을 떠난 후에 윤희의 삶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우와 윤희가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 둘의 사랑의 시작과 정점은 현재와의 교차편집, 빠른 편집리듬을 통해 표현되며 정서적 몰입을 방해한다. 대신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현우에게는 공백이었던 시간 동안에 윤희가 겪은 일들이다. 윤희는 현우를 보낸 후 혼자 딸을 낳고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학생 운동하는 후배들을 염려하고 도와준다. 이 시기를 설명하는 화자는 전적으로 윤희에게 옮겨오고, 윤희의 생활은 현우의 삶에 매여 기술되기보다 그녀의 현재적 고민을 통해 보여진다. 거기에 윤희와 비슷한 처지를 겪었던 어머니와 그녀 사이의 연대 고리(둘이 한 화면 안에서 다른 시선의 방향을 견지하지만 동일한 행위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운동의 역사를 설명할 때 쉽게 배제되던 여성의 이야기를 탁월하게 제시하는 장면이다.), 과거에 대한 연민과 신파적 논조를 끌어들이지 않는 딸(은성)의 복장이 더해지면서 회고적 정서를 지워나간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젠더적으로 해석하고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이 캐릭터들이 임상수식 쿨한 여성들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쿨한 여성들은 여러 평자들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남성에게' 편리한 캐릭터들이다. 영화에서 윤희의 대사처럼 여자는 숨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몸도 주지만 남자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며, 딸은 아버지의 오랜 부재를 원망조차 없이 다시 돌아온 아버지에게 의탁하려 하지 않는다. 현우의 주변에 있는 독립적인 여성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스스로 통제할 뿐- 그 짐은 고스란히 여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 아무도 그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를 보다 부각시킨 방법적 전략은 임상수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인과론적 역사 기술을 회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대 운동의 역사를 기술하는 임상수식 역사기술을 보여준다. <그해 여름>(조근식)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파간첩의 딸 정인(수애)을 모른 채 한 석영(이병헌)의 죄책감을 보여주면서, 암울한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근식 감독이 <꽃잎>의 연장선에서 남성 지식인의 부채의식을 고통을 짊어진 여성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면 임상수는 과거에 매여 허덕이는 여성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과거의 짐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재연 장면의 이미지화에 영화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점이다. 재연된 사건들은 즐비한 시체와 물량공세는 있으되,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장면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죽어있는 시체들을 부감으로 잡던 쇼트의 감성과도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재연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정원>으로 완결된 임상수의 현대사 삼부작이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 이것을 대안적 역사관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역사를 자기 트라우마화 하지 않는 임상수의 윤리성에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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