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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절규(叫)」, 구로사와 기요시, 2006

* 슬쩍슬쩍 스포일러 있습니다.


by 뮤이

2003년, 그다지 에너제틱하지도 않고 굳은 신념이나 목표도 없어 보이는 소년들의 머리 위에 뜬금없이 ‘アカルイミライ(밝은 미래)’가 떠올랐을 때, 그것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어떻게 보면 체념에서 비롯한 것처럼도 느껴졌지만, <큐어>를 비롯하여 구로사와 기요시의 전작들이 보여주는 비관적인 세계관과 비교하여 최소한이지만 희망의 여지로서 큰 울림을 주었다. 어쨌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글로벌리즘 덕택에 더 이상 (일본이라는)단일 사회 내부로 고정될 수도 없는 동시대의 문제들이 여전히 혹은 새롭게 대두되면서 새로운 세기에 대한 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2005년 작, 게다가 ‘러브스토리’였던 <로프트>의 엔딩이 보여주는 참담한 반전은「밝은 미래」의 낙인과도 같은 낙관과 비교하여 매우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것이었지만, 세계를 직시하고 고민하는 감독의 결론으로서 타당한 것이었고, 거짓 희망과 일상의 소소한 기쁨에 천착하는 다른 눈먼 영화들에 비해 오히려 신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2년이 지나 <절규>가 공개되었다. 영화 속 세계와 이것이 반영하고 있는 현실 세계는 희망과는 더욱 멀어져 가고 있고, 이 상황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단순한 비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선의 실천적 태도를 제시한다. 이제는 죽는다고, 전부 없애버리고 다시 시작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철저 작업(working-through)’라는 것이 있다. ‘훈습’이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은 간단히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어쨌든, ‘주체가 특정하게 억압했던 요소들을 수용하고 그로 하여금 반복 매커니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도록 허용하는 일종의 심리적 작업’을 말한다.{프로이트, 「기억하기, 되풀이하기 그리고 훈습하기」, 『끝낼 수 없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 도서출판b, 2004} 한편, 다카하시 테츠야는 전후 일본 사회 분석에 이 개념을 전유하여 주체를 트라우마적 사건의 ‘가해자’로서 자리 매김하면서, ‘과거의 사실을 상기하고 그에 직면하여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판단하여 과거를 과거로서 대상화하’자고 역설한 바 있다.{다카하시 테츠야,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 기억의 정치, 망각의 윤리』, 역사비평사, 2000} 트라우마의 근원이 된 사건에 대해 되도록 회피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 ‘저항’에 의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과거를 망각, 은폐, 잠재화시킨다 하더라도, 억압된 기억은 예상 밖의 시점에 돌아와 주체를 위협하게 된다. 게다가 이 과정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저항’을 극복하여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인정하기 전까지, 주체는 언제까지나 과거에 속박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 되어 버린다. 간단히 말해,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인 것이다. <로프트>의 파국은 이러한 철저 작업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주인공 요시오카는 억울할 수도 있다. 그의 ‘과오’는 실수 혹은 불운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사태를 직시하는 대신 은폐해버렸다는 점에서, 뽀샤시한 조명과 더불어 고전적 멜러드라마의 행복한 도피로 향할 듯싶던 러브스토리는, 문자 그대로 수면 아래로부터 급부상한 트라우마의 근원에 의해 차단되고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절규>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더욱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주인공 요시오카{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는 ‘요시오카’라는 이름을 가진 남성 캐릭터들이 왕왕 등장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술』(신조사, 2006)이라는 인터뷰집에서 기요시는, ‘요시오카는 대체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의 상징’이라고 밝힌 바 있다.}가 고립되어 있는 아파트 장면은 클로즈업을 거의 배제한 롱 쇼트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설정 쇼트로 전체를 조망하기 보다는 거울, 문, 문지방 등에 의해 경계지어진 공간의 한 구석에 요시오카를 배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혹은 요시오카를 중심으로 집중하다가 줌 아웃 혹은 패닝하여 다른 구석을 드러낸다. 이 구석은 여백으로 남겨지거나 그의 애인인 하루에의 공간이 되는데 이 경우 둘의 동선은 거의 겹쳐지지 않는다. 하루에는 요시오카를 제외한 다른 어떤 캐릭터와도 동시에 등장하지 않지만, 요시오카의 시점에 이렇다 하게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특권화된 시선으로부터 미끄러뜨림으로써 영화는 초반부터 하루에가 살아있는 인간도 아니며 그렇다고 요시오카의 환각이 만들어낸 캐릭터도 아닌, 유령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유령인 그녀가 왜 요시오카의 주위에 있으며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요시오카가 수사하고 범인으로 의심받는 일련의 살인사건들과 더불어 내러티브의 한 축을 형성한다. 영화 말미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장면과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이야기하는 범행동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바, 요시오카는 아마도 하루에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자 ‘전부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로프트>의 요시오카와 달리 <절규>의 요시오카는 실질적인 ‘과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히, 요시오카는 사건의 순간을 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루에의 유령이 철저 작업을 외면하고 있는 요시오카를 위협하기 위해 등장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녀는 요시오카의 불안을 위로하며, 철저 작업에 임하려는 그에게 ‘과거 따위 상관없으니 잊어’버리라고 종용하기 때문이다.

요시오카를 위협하며 내러티브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은 그의 아파트 한 구석에 등장하는 또 다른 존재, 즉 붉은 드레스의 유령이다. 그녀의 등장에 요시오카는 ‘사람을 잘못 찾았다’고 외친다. 하루에와 달리 요시오카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그녀의 죽음이 사실 요시오카 ‘책임’도 아니다. 일견 어이없게도 느껴질 만큼 요시오카에게 그녀의 존재는 굳이 은폐하거나 망각할 거리도 안 되는, 단지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찾아와 절규하며 ‘왜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았느냐’고 추궁한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5년 전 요시오카는 유람선을 타고 가다 해안가의 어느 낡은 건물 창문 넘어 한 얼굴과 마주친다. 실로 먼 거리였고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얼굴의 주인공은 건물 안에 유폐된 채 간절하게 구원을 바라던 상황으로, 결국 ‘영원한 어둠’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 깊은 원한으로 붉은 드레스의 유령이 되어 자신을 발견하고도 지나쳐버린 사람들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일상에 스쳐지나가는 무한대에 가까운 존재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깊은 원한으로부터 억지를 쓴다. ‘나는 죽었다. 그러니까 모두 죽어주세요.’

아들을 살해한 의사를 심문하는 장면에서 유령의 소환은 시각적으로 직접 재현되지는 않지만, <로프트>와 마찬가지로 철저 작업의 부재가 불러오는 전형적인 위협으로서 다루어진다. 위협은 죽음 충동으로 이어지는데 요시오카는 범인을 향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으니 살아있어서 다행이 아니냐’고 일갈한다. 요시오카는 죽음이 과오마저도 없던 것으로 하는 도피에 불과하며,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 혹은 죄책감을 느끼고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의 문제라고 확실히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죄책감을 느끼기 이전에 붉은 드레스의 유령이 나타난다. 종종 ‘책임’에 대해 어원으로부터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책임’이라 번역되는 responsibility라는 단어는 response와 ability의 조합으로서 응답 가능성, 즉 누군가로부터 말 걸어졌을 때 대답할 수 있는가의 의미라는 것이다.{다카하시 테츠야, 위의 책} 보통 ‘책임’은 개인의 과오에 뒤 따르는 주체적 실천으로 여겨지지만, 이를 ‘응답 가능성’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말 걸어지는 것 혹은 어떤 요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스스로가 과오라고 생각하는지 혹은 객관적으로 과오라고 인정되는지는 상대방으로부터 말 걸어지기 전까지 일단 부차적으로 밀려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편의상 ‘말 걸기’라고 했지만 이것이 굳이 언어적 형식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말할 수 없는 주체’가 존재하고 이 경우의 ‘말 걸기’는 단지 비명이나 ‘절규’로밖에는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살해 등의 실질적 과오를 저질렀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절규>가 보여주는 일종의 인식론적 전환이다. 영화 속에서 요시오카는 하루에와 붉은 드레스의 유령으로부터 말 걸어졌지만, 하루에의 경우는 스스로 ‘또 온다’고 말했을 뿐 요시오카에게 특별한 응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오카를 위로하는 하루에는, 일종의 모성적 캐릭터로 문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중반 거울을 통해 그녀의 시선이 관객에게 직접 향하는 장면과 엔딩 부분의 절규를 통해, 그녀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을지언정 분명한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 반면 붉은 드레스의 유령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지와 보상을 요구한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컨대 이 요구에 대답하는 것이 바로 책임이며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부분에서 밀려나 있던 과오에 대한 주체의 실천이 작용한다. 이는 일종의 철저 작업이다.

요시오카는 ‘죄책감을 느낄 수 있으니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반부 붉은 드레스의 유령을 향해 도피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망각하고 있지만 붉은 드레스의 유령과 연관된 과오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살인 사건과 요시오카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붉은 드레스의 유령은 계속 모습을 드러냈고, 요시오카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인식적 전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기억과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진실’과 마주하는 철저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을 기억해 내고, 다시 말하면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녀의 절망을 공유한다. 이는 먼 거리에서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를 발견하고도 고개를 돌려버린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요시오카는 버려진 쓰레기 같았던 그녀의 뼈를 수습한다. 주저앉아 뼈를 줍는 그를 등 뒤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는 붉은 드레스 유령의 시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만은 용서하겠어요.’ 이 장면은 일견 <호남호녀>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굳이 연상하지 않더라도, 철저 작업으로서 요시오카의 이런 행위들이 결국 애도의 과정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 요시오카는 말 걸어지지 않았던 자신의 실질적 과오 역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하루에는 유령이며 자신이 죽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시작하자’고 애원한다. 붉은 드레스의 유령으로부터 용서도 받은 마당에 더 이상의 위협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하루에는 죽었다. 게다가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죽여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요시오카이다. ‘또 올께’라며 유령이 되어 돌아와 그의 주변 여백의 공간에 머문다고 해도, 딱히 요시오카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해도, 요시오카가 붙잡고 애원하는 곳에 ‘하루에’는 커녕 ‘하루에의 유령’도 없다. 결국,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결론. 이 순간 이 영화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장 비관적이고 가슴 아픈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그 동안 일본의 대중문화 상품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다시 시작하기’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혼자서 ‘다시 시작’한다고 의지를 다져도 철저 작업 없이 트라우마는 반복될 뿐이고, 부지불식간에 지나쳐버린 무수한 과오에 대한 ‘말 걸기’에 성실히 응답하지 못하면 이것이 언제 위협으로 바뀔지 모른다. 설령 ‘용서’ 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 없었던 일’이 되지도 않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전작과 달리 일본 혹은 도쿄를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거둔다. 따라서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동시대 일본’ 혹은 ‘동시대 도쿄’라고 한정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지만, 이 글에서는 굳이 ‘동시대’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그 까닭은 일단 <절규>의 풍경이 근대 대도시 혹은 ‘개발하는 것도 부수는 것도 아닌’ 막연한 공간으로 드러날 뿐, ‘일본’이나 ‘도쿄’로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체적 지표들을 전혀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의 창문이나 복도 건너로 흘러가는 풍경들은 ‘일상’이라는 지표마저도 배제해 버린다. 형식적 측면에서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롱 쇼트 패닝으로부터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프닝의 범죄 시퀀스부터, 요시오카의 아파트, 그리고 유람선 장면 등 영화 대부분의 쇼트에서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패닝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여백을 통해 유령의 공간을 드러내면서 시각과 권력에 대한 근대적 구조를 해체하는 기능을 하는 한편, 움직임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려할 때 유령과 ‘인간’의 경계가 되었든 단일한 사회 시스템 간의 경계가 되었든 스크린과 오프 스크린의 경계가 되었든, 일련의 경계를 넘어 평면을 계속 흘러갈듯 한 인상을 준다. 특히 유람선 장면에서 스쳐 지나는 풍경들 속의 구체적인 사정에 주목하지 못하고 결국 이 지점으로부터 원한이 확장되어 ‘모두’ 죽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패닝은 단일한 쇼트의 문제를 넘어선다. 요컨대 ‘모두’라고 호명된 이상 그녀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지 않은 ‘과오’는 더 이상 요시오카만의 것이 아니며, 붉은 드레스의 유령뿐만 아니라 일상의 시선 속에서 존재 혹은 간절한 구원의 요구에 대답하지 않았던 무수한 개별 ‘과오’와 ‘원한’은 확장되어 ‘세계’를 뒤덮고, 이것이 바로 카메라의 수평적 움직임에 조응되는 것이다. 요시오카가 도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순간 드디어 일련의 지표들이 그의 시점 쇼트를 통해 드러나지만, 이 의지는 ‘일본’이든 ‘도쿄’든 지금의 장소를 벗어난다고 해도 결국 ‘모두’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경계 밖에 대한 욕망을 버리는 순간 <절규>는 ‘다른 곳’마저 아우르는 ‘동시대’를 향해 ‘말을 건다’.

그리하여 영화의 라스트 씬, 비관의 세계에 혼자 ‘용서’ 받은 혹은 홀로 남겨진 듯한 요시오카도 그를 바라보며 ‘모두 죽어주세요’라는 요구를 들어야 되는 관객들도 매우 고통스럽다. ‘용서’ 받은 자가 짊어져야하는 책무와 아직 ‘용서’ 받지 못한 관객들의 책임. 전쟁, 빈곤, 차별{구로사와 기요시는 위의 인터뷰집에서 표면화되지는 않지만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진 동시대의 문제로 이 세 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만드는 것도 부수는 것도 아닌 채 방치’하는 근대의 폭력 등 동시대의 ‘영원한 어둠’ 속에서 간절한 구원을 요구하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이를 스쳐 버리는 일은 너무도 일상적이다. 어쩌면 이 세계에 우리의 ‘실질적’ 과오가 연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절규>의 세계관은 마치 기독교적 원죄를 바탕으로 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 메시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죽는 것은 타당하지도 윤리적이지도 못하다. 마찬가지로 ‘전부 없던 것’으로 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것, 좀 크게 말해서 테러나 혁명은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말 걸어졌을 때 대답할 수는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성실하게 ‘책임’을 지자고 ‘말을 건다’. 우리는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