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지원
... 최근 몇 편의 한국영화들은 한국사회에서 가치 폄하되는 특성을 가진 여자들을 이렇게 저렇게 배열하고 재구성해 삶의 트랙에 올려놓는 ‘성형’을 시도하고 있다.김소영, 언니들이 만드는 ‘신 가족의 탄생’ - 영화 속 여자들의 근황
남성성 강화 블록버스터, 조폭코미디, 남성멜로드라마로 대변되는 이른바 'Post-IMF' 한국영화의 시기는 한 정점을 지나 해체단계에 들어섰다. <왕의 남자>, <괴물>, <달콤 살벌한 연인>, <가족의 탄생>, <천하장사 마돈나>, <미녀는 괴로워>,와 같은 2006년의 흥행작, 화제작 목록들을 보면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씨네알트가 지난 특집에서 다루었던 것과 같이 이러한 변화는 급작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꾸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함께 한동안 남성영화의 보조적인 역할에만 머물렀던 여자들이 스크린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푼수 노처녀, 바람난 유부녀, 성형미녀가 된 뚱녀, 연쇄살인범, 그리고 여자 같은(!) 남자가 그들의 구체적인 모습이며, 그녀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여성관객들과 특히 단단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 인터넷 신문은 ‘식상한 노처녀 코미디’를 한국드라마의 진부한 요소라는 기사까지 냈지만(기사에 따르면 불치병, 출생의 비밀에 견줄 정도), 최근 한국영화(와 드라마)에서의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식상’보다는 ‘지지’가 많은 편이다.
신분상승을 포기한 신데렐라 스토리?
여성판타지의 대표는 재투성이 소녀 신분으로 왕자님과의 연애하는 이른바 ‘신데렐라 판타지’이다.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약간의 변형을 겪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여성의 행복은 ‘신데렐라’의 그것을 넘지는 않았었다. 이
‘판타지’는 그 자체로 여성들이 탈출하고 싶어하는 고단한 삶과 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며, 따라서 현실이 전복되지 않는 한 이
신데렐라 스토리는 지속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여성들의 판타지로서 신데렐라 스토리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어느 순간 신데렐라 판타지들은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변종 신데렐라나 변종 왕자님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순종적이지
않고 씩씩한 신데렐라들에 왕자님은 성격이 나쁘거나 무식하거나 그도 아니면 소심하고 어리버리 했다. 이러한 자의식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면 왕자 없이도, 연애 없이도 혼자서 혹은 여자들끼리 잘 먹고 잘 살수 있다는 판타지일 것이다. 그렇게 나아간
<S다이어리>, <싱글즈>, <가족의 탄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태평한 판타지라고 비판 받기도
했다.{<처녀
들의 저녁식사>나 <바람난 가족>은 남자랑 구질구질 하게 엮이며 살지 말라는 데까지는 나아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여자 혼자 잘 살 수는 없을 거라고 말하는 영화들이다.} 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게다가 날이 갈수록 젠더 트러블이
심해지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번듯한 정규직 한자리 얻지 못 한 여자들이 남자 없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판타지이되, 판타지라서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재현영역에서 여성의 판타지의 질적 전환으로 다룰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기보다는 여전히 가끔 희귀하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보다 대중영화와 드라마들은 ‘변종’ 신데렐라와 왕자 이야기를 만드는데 골몰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여자끼리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결혼에 실패한) 주인공의 친구이야기로 흘려 전하고 주인공에게는 끝까지 알콩달콩 연애 가능성을
중심에 놓게 했다. 32살 미자에게 가장 비참한 일은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자신이 ‘싱글’이라는 사실이다.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는 상준에게 복수 하려고 상준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상준의 사랑을 얻고 싶어서 전신성형을 감행하고, 자신을
제니라고 속인다.
이 ‘변종’들이 좀 달라보이기는 하지만 말이 많아지고 오지랖이 더 넓어졌을 뿐 결국은 변형
신데렐라쯤으로 평가 받는 이유는 이 여자들이 모두 결국 ‘연애’에 빠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기존 신데렐라와 다르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새로움을 다소 폄하하는 ‘캔디렐라’니 ‘줌마렐라’니 하는 명명법이 사회적 동의를 얻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왕자님이 약속한 미래보다는 말 못하는 다니엘 헤니를
그러나 재투성이 아가씨들(혹은 노처녀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달콤한 연애이다. 날 때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신분상승은 어려운 팍팍한 세상이라 공주가 되는 건 포기했지만, 그래도 그 팍팍한 세상을 연애 없이 헤쳐
나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신 능력남 왕자님들은 더 어려지고 예뻐지고 세심하며 좀 썰렁하더라도 귀여운
‘연하남’ 혹은 ‘훈남’, ‘꽃미남’으로 대체된다. 신데렐라 아가씨는 심지어 왕자보다 백수건달 바람둥이나 철없지만 귀여운 연하들을
기꺼이 선택한다. <케세라세라>의 정유미는 <사랑은 그대 품안에> 신애라의 21세기 버전이지만(말이 더
많아졌고, 막무가내 성격에 오지랖이 넓다), 에릭은 결코 차인표가 아니다. 가진 것 쥐뿔 없지만, 대신 여자들에게 본인이 운명
같은 연애에 빠졌다는 기분이 들게 해줄 수 있는 남자이다. 미자와 지피디가 엮인다고 해서 미자가 갑자기 성우계에서
승승장구하겠는가, 혹은 서른둘의 노처녀가 아무리 라디오 방송국 피디라지만 오피스텔에 사는 스물 여섯의 연하남과 엮이는게 무슨
신분상승이 될까. 둘이 결혼한대도 적어도 몇 년간은 오피스텔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지피디가 미자를 선택했다기 보다 미자네 가족에게 어쩌다보니 지피디가 휘둘리는 이야기이다. 한편, ‘금순이’네{MBC 일일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 시동생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민기는 같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 남자다. 이휘재나 탁재훈처럼 ‘썰을 풀어가며’ ‘오빠가 웃겨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철이 없고 단순하여 모든 것에
막무가내에 진지해버려서 그걸 놀려먹을 재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민기가 영화와 TV에서 동시에 유부녀(<바람피기
좋은 날>와 노처녀(<달자의 봄)>의 연하남으로 엮여버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핍된) 남자와 여자의 (모계중심의) 가족 구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재투성이 아가씨들이나
노처녀들은 가난하거나 연애를 못 하는 흠은 있지만, 대개 모계중심의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가족에서 성장했고, 행복한 연애의 결말은
철없는 연하남, 로맨티스트들이 이 가족들에게 편입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재투성이가 고군분투하며 궁에 들어가는 스토리인 신데렐라
이야기나 캔디가 입양된 가족 주변 남자들을 두루두루 거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과 여성 - 싱글이고 직업도 있지만...
우에노 치즈코는 ‘생산재로서의 남자’와 ‘소비재로서의 남자’를 분류한 적이 있다. 전자는 여자에게 생활 보장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남자라면, 후자는 경제적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잘 배려할 줄 알고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남자라는 의미이다. 우에노
치즈코에 따르면 여성들의 취향이 ‘생산재 남자’에서 ‘소비재 남성’으로 변하는 것은 여성에게 실력이 생겼다는 증거이다.
여
성들에게 ‘실력’이 표현될 수 있는 통로는 다양하겠지만, 대개는 (아버지, 남편) 독립하여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로 대표되는 90년대 초반의 이른바 ‘커리어 우먼’의 등장은 일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왔다. 일하는 여성은 전문직 여성이며 자신의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아는 정도의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까지
‘실력 있는 여자’의 연애는 사실 여자의 판타지가 아니었다. 냉혈한이고 위협적인 전문직 여성은 알고 보면 언제나 외롭고, 연애를
모르거나(혹은 실연의 상처가 있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보다 더 뛰어나고 실력있는 남성을
만나 기대게 되고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이른바 ‘전문직 여성’의 연애 이야기는 여성들의 판타지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의
호기심과 두려움에 근거한 판타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흥미로운 변화는 일도 있고 싱글이긴 하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이 스크린과 TV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성들은 평생을 일한다. ‘생계 부양자 남성/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은 생계 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이다.{따라서 정희진은 여성이 공적영역으로 진출하는 것만큼(그보다 더) 남성이 사적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비정규직 노동인력의 대부분이 여성 인력일 뿐 아니라 구체적인
통계에 잡히지는 않지만 가업을 돕는다거나 이른바 가내 부업 등의 일을 통해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고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대왔다. 그러나 90년대 초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른바 ‘커리어 우먼’들은 (주로 남성들이 점유하고 있던 분야에서) 눈에 띌만한
성공을 거두고 일반적인 여성의 일상과는 다른 ‘일만을’ 위해 사는 특별한 여성으로 그려지면서 다수의 ‘일하는 여성’과 구별시키고
그녀들을 비가시의 영역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대졸이든, 고졸이든, 유학생이든 ‘자아를 실현’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먹고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일을 찾아야 하는 시대적 상황이 ‘일하는 여성’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회적 재현을 낳았다.
물론, 이전에도 소녀가장이 되어서 온갖 일을 전전하며 구박받는 ‘캔디’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녀의 ‘일’들은 왕자님이 나타나서
구해주어야만 하는 가련한 그녀의 운명을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그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학습지
교사, 주차요원, 놀이공원 직원, 패밀리 레스토랑 종업원, (한때는 배우였던) 프리랜서 성우, 비정규직 경리 직원, 고졸 파티쉐,
실업 소프트볼 선수, 출판사 편집 직원... 등등 일에 대한 욕심이 있긴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일터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방’을 가질 만큼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이면, 그래서 굳이 ‘생산재로서의
남자’에 매달리지 않을 만큼이면 충분하다. 싱글이고 직업도 있지만 화려하지는 않고, 매달 통장 잔고를 걱정하면서도 부지런히
자기만의 방을, 여행을, 사랑을 계획하는데 게으르지 않은 여성들이 당대 여성관객들의 동일시의 대상이다.
‘동일시’와 ‘대상화’의 즐거움
당대의 재투성이(비정규직 아가씨들과 노처녀)들의 영화와 드라마들은 동일시의 대상이이라면 ‘소비재로서의 남성’들은 감상의
대상이다. 이시대의 꽃미남, 훈남, 연하남들은 생산이나 책임에서 훈방된 대신 치유와 배려, 즐거움을 담당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최근 감상하는 대상으로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다니엘 헤니’이다. 로라 멀비는 (관객과 남자주인공이 동이시한
관음증을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긴장과 동력으로 사용한 히치콕과 비교하며) 존 스턴버그의 <모로코>는 관객이 남자
등장인물의 시선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그 자체의 시선으로만 마들렌 디트리히를 바라볼 수 있는, 즉 그 어떤 내러티브와도
관련 없이 마들렌 디트리히를 물신화하는 그 순간의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즉 디트리히를 물신화하는 시선은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시선은 관객 모두의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모든 관객은 남성이다. 다니엘 헤니가 주연한
<미스터 로빈 꼬시기>는 성별관계가 역전된 <모로코>이다. 사실 이 영화가 설정한 다니엘 헤니의 캐릭터는
흔히 남자들이 생각하는 ‘다니엘 헤니가 여자에게 인기 있는 이유’를 기반으로 한다. 그는 외국계 금융 회사의 능력있는 여피
상사이며, 영어로만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영화를 관람하는데 별로 영향력이 없다. 게다가 전형적인 로맨틱 코메디의
플롯을 따라갈 뿐 게으르다고 느낄 정도로 이 영화처럼 연애게임은 지지부진하며 긴장감이 없다. 엄정화의 캐릭터는 전문직인데다
어리버리 귀엽다는데 어차피 잘 기억나지도 않을뿐더러 굳이 그걸 기억하면서 영화를 보는 건 영화감상을 방해한다. 한국어 대사를 말 할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는 상사나, 그 반대인 전문직 여성이라는 이상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그런 내러티브상의
핍진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관객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 영화의 요소는 다른 곳에 있다. 다니엘 헤니의 등장과
함께 영화의 모든 것은 순간 정지이며 영화의 여성관객들은 다니엘 헤니를 보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다수의 여성관객을 모으는 데에는 실패했다. 남성적 쾌락 구조의 문자 그대로의 전복은 여성적 쾌락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 낯선 것 괴기함이 된다. 한 때 유행하던 가부장적 사회를 성별관계만 바꾸는 글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었지 결코 여성적 쾌락에 기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헤니를 보는
것은 좋지만, 남성들이 마들렌느 디트리히를 마치 여신처럼 감상하듯 ‘감상자의 시선에 완전히 통제된 말 못하는 남성’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상상적 관계 속에서 대상화이기는 하지만, 더 상호적이고 더 친밀한 관계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헤니의 얼굴이
더 멋있게 나오는 cf들도 있지만, 헤니 삼촌의 밥솥 cf가 더 인기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소비재로서의
남성’들이 대중문화에서 안정적인 재현물로 안착하는 과정은 오랫동안 남성적 내러티브, 시각장치 등을 비판해 온 페미니스트 영화
연구자에게 반대로 물어지던 질문의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남성중심 영화의 내러티브나 시각적 효과의 반대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인가?” 내지는 “관계에 있어 상대방을 전혀 대상화 시키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 이 두 질문은
‘남성적 쾌락’ 구조가 아닌 다른 어떤 대중재현물에 대한 상상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대중적 재현물에서 여성적 쾌락의
가능성은 위협이나 도발, 전복성, 낯설음의 문제로서 제기되거나 징후적 독해·결을 거슬러 읽기로서 탐색해 온 역사가 있다. 이제는
여성 대다수가 동일시하는 여성의 캐릭터와 여성 대다수에게 대상화되는 남성 캐릭터의 대중적인 모델이 발견되고 안착화 된 것이다.
멈추어선 판타지 - 전복적이지도 낯설지도 않은...
안착화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성찰적이지 않다는 말과도 통한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과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캔디렐라’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좌충우돌하며 의도치 않게 더 급진적이게 나아가기도 하고,
그래서 상처 받기도 하고 스스로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에 대한 자의식으로 고민하는 마음이 전달되었었다면 최근
‘달자’나 ‘미자’의 이야기들은 이미 검증된 몇가지 설정들을 버무린 후 별 고민없이 ‘소비재로서의 남성’과 결합되는 마무리로
멋쩍게 끝난다.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전문직 콤플렉스’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 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그 콤플렉스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결혼과 연애에 관해서는 안전한 결말에 대해 매끄럽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자의식이 너무나
커서 제대로 봉합되지 않았다. 그건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않은 <파리의 연인>도 마찬가지였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삼순의 연애에 대한 환상을 결코 버리도록 하지 않지만, 그런 연애 콤플렉스 또한 의식하고 있기에 삼순의
연애를 지켜주면서도 그것을 최대한 낭만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싱글즈>의 결말은 말도 안 되는 판타지라는
남성들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가장 용감한 판타지를 보여줬다.
‘안착화와 성찰하지 않음’은 적당한 봉합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도 위험하지만, (좌충우돌이든 갖가지 콤플렉스로부터 빠져있든) 비로소 여성들이 대상화하지 않고 타자화되지 않던 이야기들이 몇몇개의 성공 요인들로 결합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그 자체가 타자화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 위험하다. 대표적인 예가 <미녀는 괴로워>이다. 언뜻 소외된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지만 <미녀는 괴로워>는 ‘뚱녀들’이 혹은 ’성형미녀‘들의 동일시를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뚱녀’와 ‘성형미녀’들을 타자화 시키고 (수집된) 그녀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뚱녀’와 ‘성형미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가 원작 <미녀는 괴로워>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그 점이다. 원작 만화 <미녀는 괴로워>는 “미녀는 줄을 서지 않는다”, “미녀는 사과하지 않는다” 등등 원칙을 내세우며 이른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미녀의 행동을 패러디 하며 미녀가 아닌 대다수의 여자들의 입장에서 ‘미녀’, 그리고 그보다는 ‘미녀’에 쩔쩔매는 남성들을 시키며 패러디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삼순이’나 ‘미자’의 팬들이 여성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반면 <미녀는 괴로워>의 팬이 특별히 여성편향이 아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기획특집 > 2007-06 상반기 기획'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07 상반기 기획특집 (1) | 2007.06.24 |
|---|